<오르쾨르텐 이야기> 제 6편

오르쾨르텐 이야기 6편입니다. 제가 쓴 부분이 안 끝나네요.
몇 년 전의 저에게는 지금에 제게는 없는 근성이 있었나 봅니다 ㅇ<-<
오 마이 근성들아 너네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이니........

요새 포스팅도 정말 띄엄띄엄하네요.
처음에 이거 연재 시작할 때는 보통 포스팅 두세 개에 이거 하나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제가 나쁜 게 아니구요 다 입시랑 졸업논문 때문이에요..... 제가 나태한 게 아니라요 ^ㅂ^ (생-긋)

......네 구차한 변명은 여기까지 하게꾸염

그나저나, 이번 회에 드디어 나오십니다. 저로 하여금 이 해묵은 옛날 소설을 다시 꺼내오게 만든 장본인.
이 소설에서 주인공보다 더 애죵하고 있는, 주인공 아데크레노헨의 친구 에르카에즈 파페레닐런 체르에이유입니다. 작중 '에느 체르에이유'라고 등장하는 여자인데요. 이 이름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동네에서는 결혼해도 남편 성은 따르지 않지만, 호칭은 누구 부인 이런 식으로 불려요.
사실 결혼 전에 불리는 '누구 양'도 '누구 딸'이라는 소리지요 뭐...
그래서 유부녀 이 여자는 사실 '르 뵈시 부인'이 되어야 하는데(남편 이름이 르 뵈시), 고런 남성중심사상에 밸이 틀린 이 여자는 그 호칭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의 원래 이름에 특수한 호칭 '에느'를 추가하여 자기 자신을 '에느 체르에이유'라고 지칭합니다. 결혼하였으나 자신의 본디 이름을 사용하는 여성에게 붙이는 호칭인 셈인데, 저게 왜 '에느'인지는 쓰다 보면 길어질 테니 다음 기회에...

6편 시작합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파티장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귀부인들 반수는 기절해 쓰러졌고, 남은 반수도 이런 무서운 곳에는 단 일 분도 더 못 있겠다며 입을 부채로 가리고 동행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남성들은 그나마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침착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수가, 자신들의 예감이 적중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살해당한 사람이 저 멀리, 학문의 도시라는, 북동쪽 대륙의 최강대국 토헤인 제국의 수도, 예드넨에서부터 초빙한 노학자라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 사람과 아주 가까운 사람은 이 주위에 없었으며, 또한 그 말은,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 교수와 동일한 동기로 살해당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으며, 믿고 싶어했다. 살해당한 사람이 자신이나 자신이 아는 사람이 아닌 것에 감사하며, 사람들은 몸을 떨고 신의 이름을 불렀다. 두 손을 모으고 가슴과 이마를 치며, 신의 가호를 빌고 또 빌었다.
바르베르덴 왕자는, 아수라장이 된 파티홀 안의 뒤처리는 자신의 비(妃)인 세라코에노와 여동생 다세르노에에게 맡겨 두고, 시체가 발견된 장소로 다가갔다. 그 곳엔 이미 근위대장 소보에라호와 보안경비대장 파라니아론, 아스페라노덴 치안총감 코도노티오, 궁정 수석의 사히에르조가 있었다. 그리고 시체를 옮길 환자이송용 간이침대를 든 하인 몇몇과 함께, 시체의 발견자인 아데크레노헨도 물론 그 자리에 있었다. 얼결에 아데크레노헨의 명령조 부탁을 수행해 버린 제카요브는 수치심에 발코니를 떠버린 지 오래였고, 카이올레이네는 궁녀를 잘 보살펴 달라는 아데크레노헨의 부탁을 받아 의료 담당 하인을 따라가서, 지금 이 자리에는 없었다.
바르베르덴은 아데크레노헨을 보자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여어, 페리노에라. ……어째 자네는 이 나라의 안 좋은 꼴이란 꼴은 다 보게 되는구만.”
“존귀하옵신 왕자님께 선조 만세의 명예와 번영을.”
아데크레노헨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삼십 줄을 이제 막 넘겨 아직 젊은 혈기가 얼굴에 완연히 드러나는 바르베르덴 왕자는, 그러나 어쩐지 피곤에 절어 그늘이 진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여 아데크레노헨의 인사를 받은 후, 바닥에 엎어져 있는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큰일이군……, 모처럼 왕실의 과학수준을 높여 보고자 예드넨에서부터 어렵게 어렵게 초빙해 온 한노 교수가 이처럼…….”
바르베르덴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잘못하면 대륙간 마찰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겠군, 이거…….”
“왕자님.”
치안총감이 바르베르덴을 불렀다. 바르베르덴이 그에게 가까이 가자, 그는 왕자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역시 그 사건의 연장일까요?”
“그렇다면 일이 커지겠지…….”
말 그대로 설상가상, 산 넘어 산이었다. 왕자가 현기증이 나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고 손을 들어올려 손바닥에 이마를 댔다.
“하지만 한노 교수는 다른 피해자들과 성향이 너무도 다릅니다. 아마 이 아스페라노덴에서 이 사람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 사람을 죽인 것일까요?”
“그걸 알아내는 게 자네 역할 아닌가!”
왕자가 신경질적인 어투로 괴롭게 이 말을 뱉어내자, 치안총감이 움찔 놀라며 곧 고개를 숙였다.
“쿄와로엔 대사제는 아직인가!?”
왕자가 피곤한 기색으로 묻자, 모인 사람들은 서로 우물쭈물대며 눈치만 살폈다. 바로 그 때, 거구에 알맞게 살이 붙은 선량한 얼굴을 한 성직자 한 사람이 법의를 휘날리며 발코니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발코니에 발을 들여 시체를 보자마자, 상당히 놀란 듯 신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황급히 두 손을 모아 가슴을 두 번 치고 이마를 두 번 친 후 깍지 낀 손을 턱에 대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기도는 그리 짧은 것이 아니었지만 왕자는 참을성 있게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오히려 기도문을 맺는, ‘다레야테노아(신의 권위로).’라는 부분에서는 자신도 함께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사제는, 그 긴 기도를 하고 나서도 몇 번이나 죽은 자와 어두운 세태를 한탄한 후에야 왕자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는 왕자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세속의 군주보다는 신을 모시는 사제라 다른 사람들의 인사와는 모양새가 달랐다.
“시작해 주시오.”
왕자는 시체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며 사제에게 길을 터 주었다. 사제는 시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경서를 펴 자신의 옆에 두고 가방에서 갖가지 성물을 꺼내 늘어놓은 후, 성물 중에서 신비로운 색깔의 액체가 든 병 몇 개를 집어들고 기도문을 읊조리면서 그것을 섞었다. 그리고는 그 액체의 색이 완전히 무색 투명해졌을 때 병 뚜껑을 열고 공중에 내용물을 확 뿌렸다. 그 액체는 신기하게도 공중에서 어디로 사라졌는지 시체 위에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사제는 시체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서 기도를 마쳤다. 일어서는 대사제를 보며 왕자가 입을 열었다.
“죽은 자에 대한 축복은 모두 끝난 것이오? 수고하셨소.”
왕자는 성급하게, 그러나 정중하게 사제에게 치하의 말을 건넨 후, 근위대장에게 눈짓을 했다. 근위대장은 줄곧 간이침대 곁에 서 있던 하인들에게, 시체를 치우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들이 시체에 막 손을 대려는 참이었다. 아데크레노헨이 그들 앞을 막아섰다.
“전하, 지금 무엇을 하시려는 참이십니까?”
바르베르덴이 슬쩍 이맛살을 찌푸렸다.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뻔한 질문이 어디 있냐는 듯, 몇몇은 어이없는 눈길로 아데크레노헨을 쳐다보고 몇몇은 혀를 찼다. 왕자는 그가 외지인임을 깨달았는지, 너그럽게 그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죽은 자는 축복의 의식을 마치고 바로 가족과 선조에게 돌아가는 거라네. 이것이 우리 오르쾨르텐 왕국과 아스페라노덴의 법도라네.”
주위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는……, 그 전에 조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옵지는 않으십니까, 전하!”
아데크레노헨이 여전히 시체를 가로막고 서서 말했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반응은 뜨악하기만 했다.
“무슨 소린가, 자네……. 물론 조사를 해야지. 그러나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있지 않나. 한시라도 빨리 쉴 수 있게 해 주고 조사에 들어가도 늦지 않네. 자, 어서 시신을 모셔가도록 하라.”
“안 됩니다!”
아데크레노헨이 다급하게 외쳤다. 왕자가 놀란 듯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안 됩니다, 전하. 전하께옵서도 이 학자가 왜 살해당했는지, 또한 누구에게 살해당했는지 밝히고 싶으시고, 또한 밝히셔야 하지 않사옵니까.”
바르베르덴은 잠시 아데크레노헨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살인 사건에서는 시체 그 자체가, 살인범에 대한 가장 큰 힌트 중 하나인 법이옵니다. 이 시체를 조사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쿄와로엔 대사제가 모은 손으로 가슴과 이마를 수 차례 치면서 또 기도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험상궂은 얼굴을 한 거구의 치안총감이 아데크레노헨을 칠 듯이 달려들었다.
“이 천박한 것! 그래 너는 죽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단 말이냐! 이미 넋을 잃은 육체에게서 대체 무엇을 조사한단 말이냐! 네녀석이 죽은 자 곁에서 어정거린다고 망자의 혼이 도로 돌아와 자신을 죽인 자를 말이라도 해 줄 것 같으냐? 어찌 그리 몽매함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입에 올리느냐!! 더군다나 왕자님 앞에서 불손함도 모르는 것이냐?”
“그보다는 범인과 사인을 밝혀 망자의 한을 풀어 주는 편이 더 죽은 자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도노티오의 윽박지름에도, 아데크레노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응수했다. 그런 아데크레노헨의 모습에 코도노티오는 더욱 화가 치밀어 아데크레노헨의 얼굴 바로 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 막 소리를 지르려 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 왕자의 저지하는 목소리가 들려와 그는 마지못해 아데크레노헨에게서 떨어졌다.
“그만 두게, 치안총감! 페리노에라는 외지인일세. 우리 나라의 풍속과 다른 곳에서 살다 온 것일 수도 있지……. 그러나 페리노에라, 아무리 자네여도 이번 말은 좀 심했네. 죽은 자에게 어떤 조사가 가능하단 말인가? 조사는 우리 쪽에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네. 자네는 국빈이야. 시체를 발견하느라 수고하였네만 이제는 이 일을 잊고 편히 이 나라를 즐겨 주게나. 공연히 망자의 넋을 괴롭혀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이. 이야기 끝내세.”
“저, 전하…….”
왕자는 아데크레노헨의 간곡한 목소리도 개의치 않고 다시 손짓을 했다. 간이 침대를 든 하인들이 아데크레노헨을 둘러 시체에 다시 다가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였다.
“잠깐만요!!”
발코니 입구 쪽에서 한 여성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 아스페라노덴에서 보기 드문 부스스한, 그러나 어딘지 정돈된 느낌의 곱슬머리에, 역시 아스페라노덴에서 드문 옷차림을 하고 당당히 발코니로 걸어 들어온 그녀는, 프린세스 라인이 사용되어 몸에 꼭 끼는, 퍼프 소매조차 사용되지 않은 테일러드 재킷에 가슴이 깊이 파이고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는 머메이드 드레스를 함께 입고 있었다. 이것은 스커트가 360도로 퍼지고 3중 4중의 퍼프나 레그 오브 머튼 소매 일색인 요새 아스페라노덴의 유행에 완전히 반하는 것이었지만, 그녀의 성숙된 풍만함 위에서 어떤 유행보다도 세련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매력을 뿜고 있었다. 유일하게 화려한 드레스 밑단이 여섯 층의 프릴과 레이스로 화려하게 물결치는 가운데, 발에는 검은 새틴으로 만들어진 하이힐을 신은 그녀는, 드레스조차 펴 잡지 않은 채 오른발을 앞으로 뻗거나 왼발로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지도 않고 단지 검은 새틴 장갑을 낀 팔과 손만으로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바르베르덴 전하, 그간 옥체 보존하옵시며 존귀한 왕실은 내내 평안하옵셨나이까.”
“르 뵈시 학사 부인!!”
코도노티오가 으르렁대듯 그녀를 불렀다.
“에느 체르에이유입니다.”
그녀가 짧게 코도노티오의 말을 정정하고는, 바로 왕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코도노티오는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저 여자 또 시작이로군. 어디 결혼한 여자가 감히 남편 이름을 팔아먹고 자기 이름을 대? 저 옷차림은 또 뭐고? 적어도 남들만큼은 입어야지, 꼴사납게…….
코도노티오의 그런 속내는 아랑곳않고, 에느 체르에이유는 왕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바르베르덴 전하, 페리노에라 씨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저 역시, 페리노에라 씨와 마찬가지로, 죽은 자의 신체에서 알아낼 수 있는 바가 많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옵니다.”
“에느 체르에이유, 그대 역시?”
왕자가 살풋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에느 체르에이유의 단호한 눈과 엄격히 다문 붉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맹수라도 삼켜버릴 듯한 표정으로 네 그렇습니다,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죽은 시체에게서 뭘 알아낼 수 있단 말이오? 죽은 자가 말이라도 한다더이까? 그 조사라는 것을 어떻게 한단 말인지? 본인은 도저히 모르겠소이다.”
“조사라는 것을 꼭 이성에 이성을 통해, 언어에 언어를 통해 실행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닌 줄로 아룁니다, 전하.”
에느 체르에이유가 깍듯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는, 시체의 신체를 조사하여, 죽은 자가 어떤 방법으로 언제 죽었는지를 알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노 교수의 출신지인 토헤인에서는 이는 당연한 과정입니다.”
“죽은 자를 만지고 뒤집고 옷을 벗긴다고?”
왕자가 대경하여 안색이 변했다. 저편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쿄와로엔 대사제가 기절해 넘어진 소리였다. 하인들이 그에게 몰려가서 그를 간이 침대에 싣고 나갔다. 어쨌든 그들로서는 임무 완수한 셈이었다.
“네, 전하. ……필요하다면 죽은 자의 배를 갈라서 안에 뭐가 들었나 보기도 합니다.”
에느 체르에이유가 장난기 섞인 말투로 태연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미 혼이 나갈 정도로 놀라 있었다. 근위대장은, 마치 아까 사제가 그랬던 것처럼, 연신 모은 손을 가슴과 이마에 대고 기도문을 읊조렸다. 보안경비대장은 혐오감 어린 눈으로 이 대담한 여성을 노려보았다. 코도노티오는 칼을 뽑을 태세였다. 아데크레노헨마저도 끔찍한 장면이 연상되었는지 순간 입을 손으로 막고 눈을 감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오, 에느 체르에이유! 여러 해 동안 그대와 좋은 감정으로 지내온 일들이 후회스러울 정도요. 지금 연구 여행중인 그대의 남편이 여행에서 돌아오면 이 일을 다시 언급할 것이오! 더 들을 것도 없소이다! 죽은 자는 지금 당장 안식처로 갈 것이오!”
왕자가 노기등등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때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밤 공기에 울렸다.
“왕국 학사 르 뵈시 문안드리옵니다. 왕국의 머리는 하늘을 우러르고 왕국의 심장은 사해를 아우르옵니다, 전하.”
“르 뵈시 학사!”
왕자가 당황한 얼굴로 간신히 입을 뗐다.
“어떻게 된 일이오, 학사께서는 지금 연구 여행으로…….”
거구에, 척 봐도 현명함이 우러나오는 훌륭한 풍채의 르 뵈시는 깍듯하게 말했다.
“전하와 왕실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어 연구는 순조로웠고, 그 결과 예정보다 일찍 연구를 마무리하게 되어 이렇게 일찍 돌아오게 되었사옵니다. 제 연구가 일찍 진행된 것에는, 물론 왕실의 배려도 있었지만, 지금은 죽은 저 친구의 도움도 컸사옵니다.”
르 뵈시는 말하면서 두 손을 모아 가슴과 이마에 갖다 댔다.
“저 사람과 그대가 아는 사이오?”
왕자가 갑자기 흥미가 도는 듯 이야기했다.
“제가 토헤인 제국의 예드넨에서 다년간 교수 생활을 하였던 것을 존귀하옵신 전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그 때 같은 대학 소속이던 한노 교수와 알게 되어, 그 후로도 절친하게 지냈사옵니다. 제 아내도 그 때 제가 몸담던 대학에 유학하고 있었던 터라 그와 제 아내 역시 잘 알고 지내던 터입니다.”
왕자가 에느 체르에이유를 보고 물었다.
“그대도 한노 교수를 알고 있었다?”
“제 과학철학 기말 논문에 낙제점을 주셔서 학점을 반이나 깎아먹게 만드신 분이십니다.”
에느 체르에이유는 여전히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아스페라노덴에는 대학이 없기 때문에, 왕자로서는 논문이며 학점이라는 어휘가 생소하기만 했다. 사실상 교수라는 직분도 왕자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때문에 에느 체르에이유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기는 했지만 어쨌든 왕자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아는 사람의 시체를 마구 들쑤신다는 것이 말이 되오? 본인은 그점 결코 용납할 수가 없소.”
“마구 들쑤시는 것이 아닙니다.”
에느 체르에이유가 단호하게 말했다. 딱 잘라 왕자의 의견에 반대하는 그 말을 들으며, 근위대장과 보안경비대장, 그리고 치안총감은 순간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현재 왕국 최고의 세력을 지닌 왕자에게 저렇게 전면적으로 대들 수 있는 것은, 왕자와 에느 체르에이유가 어릴 때부터 쌓아온 친분도 친분이거니와 에느 체르에이유 그 사람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호방함 때문일 것이다.
“죽은 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일단, 시체에 손상을 가하지 않고 조사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전하. 조사를 더 진행시킬지 말지는 그 다음에 전하께옵서 친히 정해 내려 주시오소서.”
르 뵈시가 조용히 그 다음 말을 이었다.
왕자는 한동안 생각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야기했다.
“죽은 자에게 죽음의 저주를 받게 되어도 나는 모르오.”
에느 체르에이유와 르 뵈시, 그리고 아데크레노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에느 체르에이유가 아데크레노헨에게 살짝 윙크를 했다. 아데크레노헨은 환한 얼굴로 에느 체르에이유와 르 뵈시에게 웃어 보였다.

by 난난 | 2008/11/19 01:09 | - scriptura (글)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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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ZOON at 2008/11/19 01:58
아아... 드디어 이해자가 생겼네요...
Commented by 난난 at 2008/11/22 00:24
ZOON 님> 넵 ㅠㅠㅠ 아데크레노헨에겐 빛과 같은 누님이에요 ;ㅅ;*
Commented by 아난드 at 2008/11/29 01:10
'(전략) 그녀는, 프린세스 라인이 사용되어 몸에 꼭 끼는, 퍼프 소매조차 사용되지 않은 테일러드 재킷에 가슴이 깊이 파이고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는 머메이드 드레스를 함께 입고 있었다. 이것은 스커트가 360도로 퍼지고 3중 4중의 퍼프나 레그 오브 머튼 소매 일색인 요새 아스페라노덴의 유행에 완전히 반하는 것이었지만, 그녀의 성숙된 풍만함 위에서 어떤 유행보다도 세련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매력을 뿜고 있었다. 유일하게 화려한 드레스 밑단이 여섯 층의 프릴과 레이스로 화려하게 물결치는 가운데, 발에는 검은 새틴으로 만들어진 하이힐을 신은 그녀는, 드레스조차 펴 잡지 않은 채 오른발을 앞으로 뻗거나 왼발로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지도 않고 단지 검은 새틴 장갑을 낀 팔과 손만으로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하략)'

언니... 의상 매니아인줄은 알았지만.. 덜덜 전 언니가 말하는 옷스타일이 뭔지 반쯤밖에 이해 못한 것 같아요! 언제 의상 특강이라도+_+ 재밌게 읽고 있답니다!!
Commented by 난난 at 2008/12/04 16:13
아난드> 엥? 그림으로라도 그려 올려놓을 걸 그랬나.... ^^;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대로 쭉 적어내려간 건데.
그림 그려서 보여주면 친숙한 스타일일 거야~ 용어들 자제한다고 했는데, 역시 오덕스러웠나 ㅇ<-<
이쪽에 관심 있다면 대환영! 마침 자료도 꽤 가지고 있으니 정말로 알고 싶으면 특강(?) 해 줄게 ^^!
Commented by at 2009/11/09 01:58
언니! 저 특강 요청이요.... ㅜ_ㅜ ㅋㅋㅋㅋㅋㅋㅋㅋ
Commented by 난난 at 2009/11/09 02:06
쥬> ㅋㅋㅋㅋㅋㅋ 언제 연구실로 와 ㅋㅋㅋㅋㅋㅋㅋ
그 자리에서 그림 그려가며 설명해 주마 ㅋㅋㅋㅋㅋㅋㅋㅋ
Commented by at 2009/11/09 02:07
꺄아아 네 *ㅁ*ㅁ*ㅁ*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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